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단 편집) == 기타 == 동시대 한국 작가 중에 [[김동인]]이 이 사람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특히 아쿠타가와의 대표작 [[지옥변]]과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광화사]]를 비교하는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다. 작가로서의 김동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 아쿠타가와의 영향력을 들어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시절 만나 짧지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문단선배 [[나쓰메 소세키]]와 똑같이 위장병을 앓았다. 술을 멀리하고 단 음식을 좋아한 식성도 같다.[* 류노스케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글 중에 자살 한 달 전에 쓴 팥죽(일본식 단팥죽인 [[시루코]])이라는 수필도 있다. 도쿄의 팥죽맛을 칭찬하며 서양인들도 팥죽 맛에 감탄해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듯 팥죽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다만, 소세키는 위가 안좋은데도 음식, 특히 군것질 거리 절제가 안 돼서 병이 악화된 면이 없잖아 있다면 류노스케는 가난에 시달리며 제대로 챙겨먹질 못해 병이 도졌다. 단 음식 중에서도 쿠즈모치를 특히 좋아했으며, 도쿄 가메이도에 있는 후나바시야(船橋屋)[* 1805년에 창업한 곳으로 쿠즈모치의 원조로 유명하다. 지금도 가메이도 덴진 신사 옆에 본점이 있으며, 도쿄와 [[사이타마현]], [[치바현]]에 지점이 몇 곳 있다. 아쿠타가와가 자주 들렀던 곳은 카메이도 본점. 또한 나가이 카후, [[요시카와 에이지]] 등 다른 유명 작가들도 이 가게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라는 가게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학생 시절부터 가게 가장 안쪽의 '지정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쿠즈모치를 먹었는데, 심지어는 중학 시절 학교 체육 수업을 째고(!) 나와서까지 후나바시야에 들러 쿠즈모치를 사 먹었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이때, 쿠즈모치를 급하게 먹고 학교로 다시 달려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입 가에 묻은 콩가루 때문에(...) 교사에게 들켜서 호되게 혼이 났다고 한다.] 한편 아쿠타가와 자신이 쓴 <나쓰메 선생님(夏目先生)>이라는 글에서 소세키와의 에피소드가 하나 언급되는데, 한 번은 동네에 불이 나서 소세키와 함께 불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게 직무질문을 받았다. 이 때 어디서 왔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집이 저쪽이니까 저쪽에서 왔다고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불은 이 쪽에서 났으니 이쪽에서 왔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라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이 말을 들은 경찰은 더 상대하다가는 귀찮아지겠다 싶었는지 그만 가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경찰서까지 가시죠! 마침 흥미도 있겠다"라고 대답해서 경찰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했다고(...). "장례식에서 우는 사람은 위선자다"라는 말을 했는데, 정작 나쓰메 소세키의 장례식에서 오열했더라... 하는 카더라가 있다. 정확한 진위여부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셀프디스(...)가 된 셈. [[일본]] [[문학사]]를 논할 때에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유명한 작가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다.[* 그의 작품을 번역한 전집이 [[2010년]]에 제이앤씨에서 나왔기는 한데(전8권), 권당 19,800원부터 33,250원까지 나간다. 번역을 여러 사람이 작품별로 나누어 맡은 탓에 그 질이나 수준이 상당히 들쑥날쑥하다. 표기법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일본식 고유 명사가 한국식으로 현지화 되어 있는가 하면 일본식으로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비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뿐만 아니라 그가 활발히 창작했던 [[다이쇼 시대]][* 1912.07.30 ~ 1926.12.25]는 한국 기준으로 [[일제강점기]]였던 탓에 이 시기의 일본 작가들은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사실상 일본 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거의 모른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며, 그나마 유명하다고 할 만한 작가는 천 엔 지폐의 모델이기도 했던 [[나쓰메 소세키]]와 [[인간실격]]으로 어느 정도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 정도. 오히려 90년대 일본문화 개방 이후 일본 서브컬처(만화, 라이트노벨 소설 등)에 만날 "[[아쿠타가와상]]"이 언급되어 그 이름은 들어봤는데 무슨 소설을 썼는지는 모른다는 쪽이 더 많을 지경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국내 문인들을 통해 이름이 종종 오르내리던 적은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사량]]의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으며, 오랫동안 잡지 [[사상계]]의 주필을 맡았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은 [[사상계]]의 주최로 [[동인문학상]]을 만들 때 아쿠타가와상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이런 문학을 장려하는 시상식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일본문화 전면개방 이전에 일본 만화가 해적판이든 정발판이든 한국화 로컬라이징을 반드시 거쳐야 하던 시절, 아쿠타가와상은 "동인문학상"으로 로컬라이징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에가와 타츠야]]의 [[골든 보이]] 해적판.]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이고, 수많은 문호들과 예술가들의 작품에 그의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작품이 퍼져나간 나라에서는 [[천재]], [[수재]] 등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활발히 연구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와 별개로 아쿠타가와는 생전 [[조선]]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김장군>. 다만 [[나카지마 아츠시]]의 <호랑이 사냥>과는 달리 일제강점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은 아니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나도는 전승을 이용하여 역사 인식은 국가와 민족별로 상대적일 수 있음을 강조하는 글이다. 따라서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이며 자국 중심적인 사관을 일정 부분 비판하는 뉘앙스도 들어있다. [[2000년]], [[아사히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5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으며 2위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6위 [[마쓰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http://info.asahi.com/guide/sp/soseki/contest.html|#]] [[2016년]]에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예술에 대한 에세이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아쿠타가와 본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아쿠타가와에 대한 번역 서적이 얼마 없는 걸 감안하면 정말 보물 같은 책이다. [[다자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와는 같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면서 [[자살]]을 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자살방법은 각자 달랐다. 다자이는 [[투신자살]], 가와바타는 가스, 미시마는 [[할복]], 그리고 아쿠타가와는 전술하였듯이 [[음독#s-2]]. [[다자이 오사무]]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다자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구름 위의 존재다. 나는 그를 모방조차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을정도로 아쿠타가와를 존경하였다. 실제로 다자이는 아쿠타가와를 보면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고, [[아쿠타가와상]]을 받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결국 받지 못하였다. 여담으로 [[다자이 오사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아쿠타가와상의 첫회 심사위원이자 다자이가 떨어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의 추리소설의 제왕으로 꼽히는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어려서 여러 소설을 탐독하는 와중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제일 좋아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세이초는 「어느 고쿠라 일기 전(傳)」으로 제28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는데, 소설 속에서 주요 주제가 되는 것은 [[모리 오가이]]의 일기. 실제로 세이초가 유년기를 보낸 곳인 고쿠라도 모리 오가이와 인연이 있는 곳이며, 세이초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모리 오가이를 자주 등장시켰다. 어느 고쿠라 일기 뿐 아니라 세이초 본인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유작 「양상(兩像)」도 모리 오가이가 등장한다. 아쿠타가와 본인도 모리의 소설을 높게 평가했었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일본 문학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점“ 이라고 표현했다. 위에도 살짝 나와있지만, 그를 기리기 위해 고등학교 동문이었던 기쿠치 간[* 당시 문예춘추사 사주]에 의해 1935년에 [[아쿠타가와상]]이 제정되었으며, 지금도 [[나오키상]]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두 개의 문학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죽기 전 [[도플갱어]]를 보고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데 말 그대로 문학계 혹은 일본에 구전되는 설 중 하나일 뿐 별로 신빙성은 없다.[* 그의 자전적 소설 톱니바퀴에서 자신의 도플갱어를 봤다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문호와 알케미스트 애니판 심판의 톱니바퀴 후반부에서 류노스케의 도플갱어 비슷한 존재가 최종보스로 등장하는데, 이를 반영한 설정으로 보인다.]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꽃병을 깬 일이 있는데, 이 일에 대해 평소 아쿠타가와가 남들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걱정하던 기쿠치 칸은 평소에 꽃병을 좀 더 깼었더라면('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면'이라는 의미)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목욕]]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목욕을 거의 하지 않았고, 어쩌다 하더라도 목욕탕에 [[수건]]을 가져가지 않았다. 제1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이었던 법철학자 쓰네토 교가 자신의 수기 '오랜 친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나마 극히 드물게 목욕을 하러 가는 와중에도 '''하도 목욕을 안 하다보니 수건 들고 가는 걸 까먹어서''' 안 가져갔던 것이라고. 또한 같은 수기에서 언급된 고교 시절의 일화 중에는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잉크병인 줄 알고 탁자에 놓여 있던 간장병을 집어들고 나왔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여성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는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꼭 열렬한 연애편지를 보냈는데, 이 연애편지가 하나같이 오글거리는(...) 문장으로 도배된 것들이었다고. 특히 후에 아내가 되는 쓰카모토 후미[* 아쿠타가와의 중학 시절 친구의 '''조카'''였다.]와 어느 정도 관계가 진전된 후 보낸 연애편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쿠타가와가 <라쇼몽>을 발표한 바로 다음 해에 보낸 것으로, 당시 아쿠타가와는 24세, 후미는 17세였다.] >후미짱이 만약 과자였다면 '''머리부터 먹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짓말이 아니예요. -- 위대한 예술가의 조건은 싸이코패스인가 -- [[속독]]이 특기였다고 한다. 일본어로 된 서적이나 잡지는 2~3명과 대화를 하면서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고 하며, 어느 동인 잡지에 실린 7페이지 분량의 글을 책장을 휙휙 넘기는 것만으로 전부 읽었다는 엽기적인 일화도 있다. 또한 영문 속독도 가능해서 한 번은 [[오사카]]에 갈 일이 있었을 때 두툼한 영문 원서 4~5권 정도를 챙겨갔는데, 두께가 상당한 책들이었는데도 이걸 기차 안에서 전부 다 읽어버린 뒤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 책을 빌려 읽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그와 교류가 있었던 의사이자 시인인 시모지마 이사오가 영문을 얼마나 빨리 읽을 수 있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아쿠타가와 曰, 일반적인 영문학 책이라면 '''하루에 1200~1300 페이지 정도는 쉽다(!!)'''고.[* 참고로 이걸 하루 1200페이지에 10시간이라 가정하고 환산하면 '''1분당 2페이지'''를 읽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친한 사이가 아닌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문예가가 되고자 하는 제군에게 보냄(文芸家たらんとする諸君に与ふ)>이라는 소품에서 문예를 지망하는 중학생들에게 [[수학]]과 체조를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훌륭한 문예가가 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해당 소품 중 "이는 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며, 또한 중학 시절을 유익하게 보내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에 대해 수학자 가타노 젠이치로는 아쿠타가와가 중학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수학은 그다지 잘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쿠타가와 본인은 중학 시절을 유익하게 보내지 못했다고 했지만 졸업할 때 다년간 성적 우수자 상장을 받았을 정도로 수재였다.] 공식적 및 비공식적으로 [[관동 대지진]] 때 [[자경단]]으로 참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쿠타가와 본인은 첫날 재일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자경단의 잔인한 민낯을 마주하고 질색해 바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집에 들어가 칩거 생활을 했고 평생 자신이 자경단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후회하며 지냈다고 한다. 참고로 아쿠타가와 본인이 배속되어 있던 팀은 직접 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도 이후 관동대지진과 관련하여 본인이 남긴 기록 등을 살펴보면 학살을 목격한 것을 암시하는 부분은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가 참여했다는 내용은 없으며, 그의 일기에서도 이런 학살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한 야유를 담고 있는 기록들이 있다. 아들 중 3남인 아쿠타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 1925-1989)는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유명하며,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황국 사관을 부정하고 [[좌파]] 음악 운동에 관여하는 등 사회파 성향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소련에 불법으로 입국해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 등과 친구로 지내며 작곡활동을 했다. 또한 장남 아쿠타가와 히로시(芥川比呂志)는 배우로 활동했고, 2남 아쿠타가와 다카시(芥川多加志)는 아버지를 닮아 문학을 지망했으나, 도쿄외국어학교 불문학부 재학 중 징집되어 1945년 [[미얀마]]에서 전사했다. 세 아들의 이름의 한자 표기가 보통 인명 표기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만요가나]]인데, 모두 친구들의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장남은 기쿠치 간의 본명인 히로시(寛)에서, 2남 다카시는 서양화가 오아나 류이치(小穴隆一)의 이름자 중 '隆(다카시)'를, 3남 야스시는 쓰네토 교(恒藤恭)의 '恭(야스시)'에서 따 왔다.--그리고 기쿠치 간은 본인 이름을 따서 지으면서 만요가나로 짓는 것에 대해 굉장히 짜증을 냈다고 한다.-- 세 아들 중에서 장남인 아쿠타가와 히로시가 그를 제일 많이 닮았던 탓에 장남을 굉장히 아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아버지를 꼭 닮았다. 목소리도 꼭 닮았다고 하는데, 장남의 목소리를 두고 아내 후미는 아들과 남편의 목소리가 매우 닮았지만 남편의 음성은 아들의 것보다 조금 더 둥글둥글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고 회고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본인의 음성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들인 히로시의 목소리는 육성테이프가 제법 남아 있으므로 이것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목소리를 추정하는 사람도 있는 편. [[1916년]](다이쇼 5)부터 [[1919년]](다이쇼 8)까지 햇수로는 4년간 요코스카에 있던 해군기관학교에서 영어강사로 근무하던 중인 [[1917년]] [[8월]] 순양전함 [[공고급 순양전함|콩고]]에 승선한 뒤 [[http://www.amazon.co.jp/%E8%BB%8D%E8%89%A6%E9%87%91%E5%89%9B%E8%88%AA%E6%B5%B7%E8%A8%98-%E8%8A%A5%E5%B7%9D-%E7%AB%9C%E4%B9%8B%E4%BB%8B-ebook/dp/B009NJPR9I/ref=sr_1_1?s=digital-text&ie=UTF8&qid=1426417978&sr=1-1&keywords=%E8%BB%8D%E8%89%A6%E9%87%91%E5%89%9B|'군함 공고 항해기']]라는 제목으로 체험기를 쓴 적이 있다. 이름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한자를 직역하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의미와 일치하며 실제로 이름인 류노스케(龍之介)는 용띠 해, 용의 달, 용의 날에 태어났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각주] [[분류:일본의 소설가]][[분류:일본 제국의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27년 사망]][[분류:주오구(도쿄) 출신 인물]][[분류:일본의 자살한 인물]][[분류:자살한 작가]][[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약물로 죽은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